박희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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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가 말하지 않은 임진왜란 이야기 - 책
hbpark  2014-06-03 07:54:18, 조회 : 1,032, 추천 :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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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응답해야 할 임진왜란의 역사적 진실과 오류_

1592년 10월 5일부터 10월 10일까지 6일 동안 10회의 전투에서 3만 명의 일본군은 김시민 목사가 이끄는 3,800명의 조선군에게 완패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1593년 1월 9일 제4차 평양성전투에서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은 조·명 연합군에게 패배했다. 이후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끌던 일본군 1번대 뿐만 아니라 함경도, 황해도, 강원도, 경기도에 주둔하던 일본군은 모두 한양성으로 퇴각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1593년 1월 27일 벽제관에서 일본군은 명군을 패퇴시켰다. 이로써 명군은 개성 이북으로 물러났고, 이여송은 평양으로 후퇴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한양성에서 빠져나와 부산성으로 물러났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하려고 준비한 일본군은 28만 6,840명이었고, 22만 4,774명의 참전 기록이 확실하다. 1593년 6월 20일 제2차 진주성전투 때 조선에 주둔하던 일본군은 12만 1,578명이다. 임진왜란 1년 2개월 동안 일본군은 최소한 출전자의 45.9%인 10만 3,196명, 최대한 출전자의 57.6%인 16만 5,262명이 사라졌다. 그리고 제2차 진주성전투를 치르고 임진왜란이 끝난 후 살아서 일본으로 돌아간 일본군은 10만이 채 되지 않는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1593년 6월 21일부터 6월 29일 제2차 진주성전투 때 일본은 약 9만 3천 명의 대군을 동원해 5천 8백 명의 조선 관군과 의병이 지키던 진주성을 공격했다. 9일 동안 25번의 전투에서 조선군이 24번 이겼고, 일본군은 단 한 번 이겼다. 일본군은 진주성을 함락한 후 충청도와 전라도, 경상도를 점령하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부산으로 후퇴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교과서가 말하지 않은 임진왜란 이야기" 맛보기_

조선군과 일본군의 전투력

대규모 전투 경험, 병력 수, 화기 측면에서 볼 때, 조선은 단기전에서 일본군과 전투다운 전투를 치르기 어려웠다. 하지만 전투가 조선 땅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장기전에서는 다른 측면이 고려된 전투력이 비교되어야 한다. … 특히 조선군은 임진왜란 초기 두 달간 있었던 대규모 전투 이후 소규모 전투에서는 지형지물을 이용한 유격전으로 대응하여 일본군에게 확실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조선군은 백성의 협력을 받아 각종 정보의 우위를 점한 채 전투를 치렀고, 무엇보다도 무기와 병량 보급에서 조선군은 일본군에 비해 확실한 장점을 보유하였다. 따라서 조선군은 단기적으로 초전의 대규모 전투에서 패전을 거듭했지만, 장기적으로는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소규모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다시 말해, 임진왜란은 조선과 일본 모두 상대방의 장점을 모르는 무지에서 비롯된 까닭에 조선과 일본 모두 비극을 맞게 된 것이다. 조선은 일본의 엄청난 군사력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여 초기 대규모 전투에 거의 대응하지 못하였다. 반면, 일본은 조선이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략을 물리친 고구려의 후손이며 몽골과 40년 전쟁을 치른 고려의 후예임을 망각한 무지와 오만으로 조선을 침략함에 따라 엄청난 희생을 치르게 된다.(1장 임진왜란의 배경)

조선 조정의 대응과 일본군 점령지에 대한 오해와 진실

이렇게 일본군이 북진하고 있을 때 조선 조정에서는 제승방략에 의거하여 기본적으로 두 단계의 방어전략을 마련한다. 하나는 경상도 지역 지방수령들과 휘하 병력을 대구로 집결시키고, 이일을 순변사로 임명하여 한양에서 대구로 파견하여 일본군을 막겠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충청도 지역 병력을 충주로 집결시켜서 신립으로 하여금 이 병력을 지휘하여 방어하겠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각 지역의 지형지물을 이용, 주요 고갯길에 장수를 파견하여 방어하도록 하였다. … 1593년 6월 평양성을 함락시킬 무렵 일본군은 가장 넓게 조선 땅을 점령한 시기였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이 당시 평양북도 및 함경북도 일부를 제외한 조선의 전 지역을 일본군이 점령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고, 당시 상황을 그린 각종 지도에서 이를 방증한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던 사실은 진실이 아니다. 우선 일본군은 전라도뿐만 아니라 낙동강 서쪽의 경상우도를 점령한 적이 없다. 그리고 일본군은 주요 도시를 점령하고, 주요 도시를 잇는 간선도로 상에 30리(12km)에서 40리(16km) 간격으로 작은 방책을 쌓아 병량을 이동시키고 있었다. 일본군이 한 지역을 점령했다고 해서 그 지역의 농촌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시킨 것은 아닌 것이다. 즉 일본군은 평양 및 함경도 주요 도시까지 진출한 것은 사실이지만 조선 지역 대부분을 점령했다고 볼 수는 없다.(2장 초기 일본군의 공세)

조선군의 반격과 일본군의 위기감

프로이스의 기록을 볼 때, 임진왜란 전황이 급변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조선 백성이 처음에는 일본군을 아주 두려워하고 무서워했으나 복종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매우 격렬하게 저항했다고 하였다. … 또한 전쟁이 오래 지속되면서 일본군에게는 큰 문제와 어려움이 발생했다. 첫째, 일본군은 서로 먼 지역에 분산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수로를 통해 일본에서 수송되는 식량을 보급 받으려면 많은 병사를 동원해 군수품과 식량을 가지러 가야만 했다. 그런데 각지에서 조선군과의 전투로 보급품을 위해 많은 군대를 동원하기 어려웠다. 또한 긴 보급로에 조선 병사들의 매복으로 일본군이 죽고 군수품이 탈취되었다. 둘째, 일본 수군은 임진왜란 초기 경상도에 있는 조선 수군의 자멸에 의해 약탈이 용이했지만, 전라좌·우수영의 적극적인 공세로 해안 고을의 약탈이 불가능해졌고 해로를 통한 보급이 차단당했다. 즉 일본군은 조선군의 매복과 습격 등 공세에 시달려야 했고, 또 보급품과 식량 부족으로 많은 병사가 죽어갔다. 따라서 7월 말 조선 봉행으로 한양에 도착한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등이 8월에 한양에서 일본군 주요 지휘관회의를 소집해야 했다. 이 회의에서 조승훈의 명군을 평양성전투에서 물리쳐 사기가 오른 고니시 유키나가의 반대로 일본군의 발빠른 철수가 단행되지 않았지만, 일본군 진영에서 전쟁 수행이 그들의 의도대로 되지 않고 있다는 위기감이 감돌고 있었다.(3장 조선군의 반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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